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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보건의료이슈

[Vol.34 3월호] 보건의료이슈 :: 의료분쟁과 근거중심의학





글. 박형욱 교수(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Phalinn Ooi/https://www.flickr.com/photos/17868205@N00/8116024703


 

 과학적 의학과 근거중심의학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2000년 1월 NEJM은 과거 수천년을 회고하며 임상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11가지 발전을 선정하였다. 인체해부와 생리의 규명, 세포와 하부구조의 규명, 생명의 화학적 규명, 의학에 대한 통계학의 적용, 마취의 발전, 미생물과 질병의 관계의 발견, 유전과 유전학의 규명, 면역체계의 이해, 인체 영상의 발전, 항생제의 발견, 분자약물요법의 발전(Looking back on the Millennium in Medicine, NEJM, 342(1):42-49, 2000). 


위 11가지 발전은 현대의 과학적 의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중 의학에 대한 통계학의 적용은 단순히 11가지 발전의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영역의 성취를 이끌고 검증하는 수단으로서 과학적 의학의 본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제임스 린드의 괴혈병 원인 규명, 존 스노우의 콜레라 역학연구에 이어 리처드 돌의 흡연과 폐암 연구는 정량적 관찰연구의 기념비적 발전을 이루었다. 이후 1950년대 영국에서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이 출현했고 1960년대 미국 NIH에서 이를 채택함으로써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근거증심의학의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는 핵심적 개념은 통계학적 개념에 근거한 증거의 질적 평가이다. 


의료인은 근거를 가지고 치료해야 한다. 만일 의료인이 근거 없이 치료를 했다면 이는 의료과실 판단의 중요한 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통계학이 적용된 현대적 의미의 근거중심의학이 의료분쟁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의료분쟁, 의료사고 그리고 의료과실


의료분쟁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법원의 의료소송 접수추이는 1989년 69건에서 2012년 1009건으로 증가하였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설립된 2012년 중재원의 사건처리건수는 112건이었으나 2014년 827건으로 증가하였다. 한국소비자원의 2012년 조정신청현황은 421건이었으나 2014년 806건으로 증가하였다(의료분쟁 조정·중재통계연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2014). 


(2012~2014년 사건종결일 기준, 단위: 건)

1) 소계=중재+합의+조정결정(성립, 불성립)+부조정 결정

2) 조정취하 및 조정각하: 조정절차 진행중 신청인의 절차 중단 또는 소 제기 등으로 인해 각하된 사건

자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2014


의료분쟁은 의료사고로 인한 다툼을 말한다.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약칭: 의료분쟁조정법) 제2조에 따르면 의료사고란 보건의료인이 환자에 대하여 실시하는 의료행위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피해가 발생한 경우를 말한다. 이는 인과관계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그러나 법원은 의료사고의 개념에 의료과실이나 인과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의료사고는 통상 의료행위가 개시된 때로부터 끝날 때까지 의료행위의 전 과정에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경우다. 이처럼 법원은 의료사고를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심리를 거쳐 과실과 인과관계 여부를 판단한다. 법원은 의료과실의 인정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시하고 있다. 


“의료사고에 있어 과실의 유무를 판단함에는 같은 업무와 직무에 종사하는 보통인의 주의 정도를 표준으로 하여야 하며, 이에는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의학의 수준과 의료 환경 및 조건, 의료행위의 특수성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대법원 2011.9.8. 선고 2009도13959 판결 등).” 

간단히 의료과실의 판단기준은 “진료 당시의 임상의학의 실천에 의한 의료수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의료분쟁에서 근거중심의학의 활용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의료분쟁에서 근거중심의학의 활용에 대해 논의해 보자. 1994년 캐나다 연구진은 널리 사용되는 수혈기준을 검증하기 위해 838명의 중환자실 환자를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 그룹은 헤모글로빈 수치가 10g/dL 미만일 때, 다른 한 그룹은 헤모글로빈 수치가 7g/dL 미만일 때 수혈을 했다. 30일 후 두 그룹의 사망률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55세 미만의 환자와 경미한 질환을 가진 환자에서는 오히려 두 번째 그룹의 사망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1999년 NEJM에 발표되었다. 단 하나의 임상시험이었지만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2007년부터 2014년 사이에 최소한 6건의 대규모 무작위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6건의 임상시험 모두 수혈을 덜 받은 환자들의 건강이 수혈을 많이 받은 환자들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Emily Anthes: Save Blood, Save Lives, Nature, 520(2):24-26, 2015).


이러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 수혈이 남용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증거의 질적 가치가 제일 높은 대규모 무작위 임상시험에서 반복적으로 유사한 결과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수술 중 수혈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외과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수혈이 불필요했는데 수혈을 남용한 과실 때문에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법원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법원은 체계적 문헌고찰을 통하여 의료과실 여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같은 업무와 직무에 종사하는 보통 외과의사를 기준으로 하며 진료 당시에 다른 외과의사도 같은 상황에서 수혈을 했을 것인지의 여부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Sackett은 근거중심의학이란 현존하는 최고의 증거를 양심적이며, 명시적으로, 사려 깊게 사용하여 개별적 환자의 진료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박민수: 근거중심의학, 대한신생아학회지 15(1):1-5, 2008). 여기서 개별적 환자라 함은 임상적 의사결정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위 수혈사례에서 보듯이 개개의 의료분쟁의 해결과정에서 근거중심의학의 체계적 문헌고찰이 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근거중심의학은 개개의 임상적 의사결정뿐 아니라 임상진료지침, 의료기술평가, 비교효과연구 등 다양한 영역에 활용되고 있다. 근거중심의학이 의료분쟁에서 기여할 수 있는 주 영역은 임상진료지침이다. 법원은 의료분쟁에서 “진료 당시의 임상의학의 실천”이라는 표준적 진료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때 임상진료지침은 중요한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할 때 체계적 문헌고찰을 중심으로 하되 당시의 의료환경과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현장의 의사들의 견해를 모아 현 단계에서 실천될 수 있고 실천되어야 하는 형태로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해야 한다. 이렇게 균형 있게 만들어진 임상진료지침은 의과대학과 전공의 수련에서 적극 활용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환자에 대한 설명자료가 만들어져야 한다. 근거중심의학이 사려 깊고 균형 있는 임상진료지침 개발로 이어져 의료과실과 의료분쟁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공감 NECA>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