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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12 4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그녀에게


글. 김선민(가정의학과 전문의)


이 글은 건강정책포럼웹진(http://www.hpforum.or.kr)에 실린 기고문의 전문입니다.

(편집자)


하비에르 바르뎀이 아닌 다른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왔다 해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카데미상을 받았을까? 영화에 대한 안목이 부족해서인지, 나더러 “노인을...”에서 가장 인상 깊고 매력적인 요소를 꼽으라면 코언 형제의 영화 만들기보다 스페인의 국민배우라는 하비에르 바르뎀이라 말하고 싶다.


연기력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깊이, 인간에 대한 이해. 그런데 어쩌면, 이런 내 생각은 이전에 본 스페인 영화 때문에 생긴 환상, 혹은 편견 때문일지 모른다.


“판의 미로”(물론 이 영화의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고 영화의 배경이 스페인 내전일 뿐이다)가 칸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22분 동안 계속되는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나라도 박수칠 만큼 완벽에 가까운 영화였다. 한편 잠깐 개봉되었다가 곧 잊혀졌지만,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또 다른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름다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뜻밖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두 아름다운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름다운 무용학도인 알리샤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이 여인을 남몰래 사모하던 간호사 베니그노는 병원에 취직해 알리샤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한편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방황하던 마르코는 취재도중 만난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진다. 리디아 역시 사랑에 배반당한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던 중이었다. 투우사 리디아가 소에 받쳐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을 때, 마르코는 리디아와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큰 실의에 빠진다.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이렇게 각기 사랑하는 여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병원에서 만난다. 비슷한 처지에 있지만, 두 사람이 상황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판이하다. 마르코가 실의의 늪에 빠져 심한 고통을 느끼지만, 베니그노는 마냥 행복하다.


반응을 하지 않을 뿐, 알리샤가 모든 것을 느끼고 있다고 믿는 베니그노는 늘 그녀에게 말을 한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alk to Her이다). 급기야 베니그노는 알리샤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고, 알리샤는 임신을 하게 된다. 알리샤의 임신 사실이 병원에 알려지게 되자, 베니그노는 환자 폭력 혐의로 유치장에 가게 된다. 알리샤는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다. 이 사실을 모르고 알리샤가 죽은 것으로 알게 된 베니그노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낙담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명료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는 나의 언변에 좌절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끝까지 스페인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인지를 말해준다. 영상, 색채, 소품, 의상, 이런 것들은 애써 아름답게 꾸민 것 같지 않다. 음악은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미학적 장치이다. 귀에 익은 곡, 라 팔로마를 그렇게 아름답게 부를 다른 가수가 있을까?


거기에다가 영화는 슬픔과 벗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영혼을 깊이 있게, 담담하게, 때론 처절하게 이야기한다. 평상의 삶을 그렇게 깊이 있게, 예술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이런 작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깊이 있는 내면과 영혼 없이 기술적인 포장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마음이 갈 때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알리샤와 리디아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입원한 요양시설에 관한 것이다. 저 사람들은 돈 걱정 안하나? 저 입원비는 누가 내나? 그리고 대책 없는 베니그노가 풍덩하고 알리샤의 간병에 뛰어 들었지만, 그가 알리샤에 지극 정성을 들이는 동안, 병원장은 다른 환자 안 본다고 닦달 안하나? 저렇게 살아도 일상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나?


영화에서 눈을 떼고 우리의 병원을 잠시 보게 되면 영화가 철없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스페인에 가면 의료제도, 특히 장기요양서비스가 어떤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 몇 명의 후배들이 스페인의 국가의료제도(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해서 견학하기 위해서 방문을 했단다. 그들에게 물어봤다. “그녀에게”라는 영화 속 시설은 과연 현실 스페인에 존재하는가 하고.


그렇단다. 방문했을 때 장기요양시설에도 갔는데, 깨끗하고 우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용 걱정 안 한단다. 이렇게 깊이 있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려면 그렇게 우아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우아하게 산다는 것이 단순히 국민 소득 수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가 우아하고, 요양시설도 우아한 스페인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