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2 6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 이야기



   글. 송윤경(경향신문 편집국 정책사회부 기자)





영화 소개를 하기 전에 약간은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지난해 이맘때 쯤이었다. 지금은 보건복지부에 출입 중이지만, 당시엔 ‘북한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라는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던 중이라, 매일 회사로 출근하고 있었다. (기자는 보통 출입처 기자실로 출근을 한다) 어느날 아침, 회사 한구석에 앉아 자료를 읽다가 심한 가슴통증을 느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주 가쁘게, 가늘게 숨을 쉬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버릴 수도 있겠구나’ 그 아슬아슬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검색이었다. 이런 증상은 보통 어떨 때 나타나는지, 어느 종류의 병원에 가는 게 좋을지, 집 근처나 회사 근처에 적당한 병원이 있는지를 찾았다. 가슴을 부여잡고 몇시간 동안 자판을 두드려댄 결과, ‘심장내과 전문’ 간판을 내건 곳이 마음에 들었다. ‘검색질’을 바탕으로 한 나의 판단에 따르면 ‘이건 심장에 관한 증상이고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찾아간 작은 병원은 매우 호화로웠다. 멋진 소파와 클래식 음악, 원두커피 머신……. 어쨌든 의사선생님은 내 증상을 듣고 청진기를 대더니, “혹시 모르니 모든 검사를 다 해드리겠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않는 각종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날의 ‘하일라이트’는 형형색색의 집게를 가슴팍 곳곳에 달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나의 모습이었다.

 

한두 시간 동안 검사를 진행한 뒤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음……. 요새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 심장이나 호흡엔 문제가 없고 심리적인 문제인 것 같은데…….”


나는 별 할말이 없었다.


“하하, 가끔 이런 분들이 계시긴 해요”


의사선생님의 처방은 결국 “마음을 편하게 가지실 것”과 “심해지면 신경정신과를 찾아보라”는 권유였다. 나에게는 거금인 검사비 30여만원을 써버린 결과는 그렇게 허무했다. 여하튼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그 작고 아담하며 아름다운 병원에 나름 ‘기부’를 한 거라고 홀로 위로(?)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 내 심장은 괜찮은 거였구나’하며 안도하기엔 상당히 민망한 경험이었다.


 

 

이 우스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얼마전 ‘테이크 쉘터’라는 슬픈 영화를 보면서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가정적이고 성실한 미국인 남성 커티스는 아내를 참 ‘흐뭇’하게 배려하고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바른 가장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강력한 예언처럼 느껴지는 악몽들 때문에 점차 망가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고 누런 빗방울에 몸을 적신 이들이 미쳐 날뛰면서 자신의 가족을 빼앗아가는 꿈이 되풀이된다. 그는 이 꿈이 현실이 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괴로워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결국 커티스는 뒷마당에 방공호를 지어, 다가올 폭풍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기로 한다. 동료와 동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손가락질한다. 아내마저 눈길이 싸늘해진다. 무엇보다, 커티스 자신도 스스로 미친 것일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정말 미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불안한 예감’이 옳았던 것일까. 커티스가 온갖 고난 끝에 방공호를 다 짓고 난 뒤 감독이 선택한 결말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를 못 본 독자를 위해 더는 말하지 않겠다.





여하튼 영화의 핵심은 ‘불안’이다. 온 신경을 곤두세운 그의 눈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 살아있는 이라면 누구나 꾹꾹 눌러놓았을 불안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불안, 사랑하는 이를 불시에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불안’은 살아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몸’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의학과 깊게 얽혀있다. 그래서 사실, 인간의 몸을 다루는 의사는 낭만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에 의사가 등장하는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의 불안을 섬세하게 포착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 의사와 병원이 자주 등장한다. 어쨌든 커티스 스스로도 자신이 무서운 상황인데, 의사에게 달려가지 않겠는가. 그는 악몽을 꾸며 부지불식간에 침대에 소변을 보게 됐고, 이부자리를 감추면서 아내를 향해 묻는다.


 “섀넌 박사님 번호 알아?”


이어 ‘섀넌 박사님’의 사무실에서 커티스는 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데, 실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대화다.


 “커티스, 잘 지냈어요? 헤나는요?”

 “네, 잘 지내요.”

 (헤나는 커티스의 외동딸로 청각장애를 지니고 있다.)


 “자 머리 젖혀봐요.”

 “감기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문제죠?”

 “요즘 들어 잠을 못드는데 도움이 필요해요.”


 “언제부터 그랬죠?”

 “4일 전부터요.”

 “저녁 8시부터는 아무것도 드시지 마시고 모든 술, 담배도 하지 말아요. 

  매일 조금씩 운동도 하고요.”


 “제 생각엔,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유가, 악몽 때문인 것 같아요. 

  처음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침대가 젖어있었어요.”


 “침대에 소변을 봤나요?”

 “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저를 공격하는 꿈을 꿨는데 그날 팔이 뜯겨져나갈 것처럼 아팠죠.”


 “최근에 어머니 본 적 있어요?”

 (커티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계속 치료와 보호를 받고 있다.)

 “한달쯤 전에요.”


 “아주 약한 정도의 진정제예요. 중독성은 없지만 며칠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여기 콜럼버스에 있는 정신과 의사 번호예요.  

  먼 곳에 있지만 최고의 의사죠. 내가 연락할 테니 만나 봐요.“

 



심오한 영화를 얘기하면서, 이런 상상은 좀 엉뚱하겠지만, 만약 1년 전의 내가, 나의 가정사와 나의 일상을 잘 알고 있는 닥터 섀넌 같은 의사를 만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 증상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고액의 검사 대신 대강 이런 충고로 진찰은 끝나지 않았을까.


“요새 일이 많이 힘들어요? 원래 잠을 잘 못자는 편이잖아요 그렇죠? 

가족 중에 심장병을 앓았던 분도 없었고……. 

일단 운동을 좀 하고 푹 잔 다음에 그 증상이 계속되는지 한번 살펴봐요. 

필요하면, 잠을 자는데 도움이 되는 약을 처방해줄 병원을 소개해줄게요.”


 



전문가들에 따르면 서구(특히 유럽)에서는 ‘패밀리 닥터’라는 게 있다고 한다. 특별한 게 아니다. 집 근처 가정의학과 의사 선생님 등이 ‘패밀리’를 잘 아는 패밀리 닥터들이라고 한다. 나의 몸에 문제가 생기면 패밀리 닥터에게 찾아가 전반적인 상담을 할 수 있고, 만약 더 심층적인 진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패밀리닥터는 다른 의사나 병원을 연결해준다. ‘나사’가 살짝 풀렸다고 해서 기계 전체를 다 뜯어보는 식의 검사는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왕 미국영화 ‘테이크 쉘터’를 소개했으니, 이 영화에 나타난 미국 의료시스템 얘기는 잠깐 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커티스는 방공호를 짓는 과정에서 직장의 장비를 활용했다는 이유로 해고통보를 받는데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의료보험 수혜 자격을 잃는다. 결국 딸 헤나는 청각을 되찾는 수술을 받지 못할 위기에 놓인다.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장면도 있다. 커티스가 직장에서 잘리기 전,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상황에서도 약값과 정신과 진료비는 그들 가족에겐 너무 비싼 수준이었다. 우리 역시 모두가 의료보험 적용을 받고 있지만 높은 의료비·약값에 휘청거리고 있지 않은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왜 나는 갑자기 숨을 못 쉬는 증상을 겪게 됐던 것일까. 냉정하게 돌이켜봤다. 내 안의 불안, 공포를 강하게 자극하는 어떤 자료를 접하고 난 뒤부터였다. 


어쩌면 이런 나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증상은 호전됐을지도 모른다. 1년 전 이맘때 적잖이 씁쓸했던 것은 단순히 수십만원을 날려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의사선생님과 기계적인 문답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는 내겐 제대로 된 ‘상의’의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어디가 좀 아프다 싶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다 보면, 동네병원에 가도 충분한 사람들이 종합병원, 대학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러면서도 처음 보는 의사와 신뢰가 잘 쌓이지 않아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요컨대, 한국에도 나 자신과 우리가족의 병력과 일상을 잘 알고, 내 몸에 관해 전반적인 상담을 해줄 수 있으며, 필요하면 다른 병원, 다른 의사에 연결도 해줄 수 있는 ‘선생님’들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사선생님과 내 몸에 대해 ‘소통’이란 것을 할 기회가 늘 열려있다면, 삶의 질은 분명 더 올라갈 것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병원과 의사를 찾는 데 너무 많은 시간, 돈, 감정을 허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