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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33 2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예쁜 치매에 걸리는 법 -소설보다 읽기 쉬운 의학책 <앞쪽형인간>-

 

 

 

글. 노진섭 의학기자(시사저널)


 

 

 

마직막장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 있다. 이처럼 여운이 긴 책은 다른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어진다. 책 ‘앞쪽형인간’이 그런 종류다. 제목만 보면 한 때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을 본뜬 처세술에 관련된 책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한 인터넷 서점에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로 분류돼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연과학 또는 뇌과학에 대한 것이다. ‘과학’이나 ‘뇌’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에서 쥐가 나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이 책은 오히려 머리를 비우고 술술 읽을 수 있다. 소설보다 읽기 쉬운 의학책이라고 표현하면 궤변일까?

 

궤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평소 착하게 살면 치매를 예방하고 설사 치매에 걸려도 증상이 순하다’고 말하면 궤변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그 궤변을 이 책에 늘어놓은 저자는 치매·인지신경학 전문가인 나덕렬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다. 이 책을 펴낸 2008년 나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중증인 치매 환자가 있었는데 계산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알고 보니 평생 세무사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계산 능력이 뇌겉질(뇌피질)에 쌓였고 다른 기능은 다 소실됐던 것이다. 이처럼 평소 살았던 삶의 방식이 치매 증상으로 나타난다. 부정적인 사고와 불량한 언행을 했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매우 난폭해지고 거칠어진다. 반대로 건강한 언행과 건전한 사고를 했던 사람은 치매가 걸려도 증상이 온순하다. 또 이런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적다는 게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나는 이를 ‘예쁜 치매’라고 부른다.”

 

저자는 예쁜 치매에 걸리는 법(?)을 이 책에 담았다. 한마디로 치매를 예방하고 증상을 가볍게 하는 방법이다. 그 핵심에는 앞쪽 뇌(전두엽)에 있다. 뇌를 옆에서 볼 때 세로로 얕게 패인 중심 고랑(central sulcus)을 기준으로 앞쪽 뇌와 뒤쪽 뇌로 나눈다. 이마 쪽에 가까운 부분이 앞쪽 뇌 즉 전두엽이다. 뒤쪽 뇌는 시각‧청각 등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한다. 전두엽은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창의력을 발휘한다.


후두엽이 손상되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정도지만 전두엽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을 못 알아보는 등 ‘나 아닌 나’가 되는 경우가 생긴다. 상식 밖의 언행을 하는 치매가 전두엽 이상에서 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중소기업 사장은 뛰어난 사업가였다. 등산을 좋아해서 몇 년 전 4700m 높이의 히말라야 산에 올랐다. 그런데 셰르파의 등에 업혀 산에서 내려왔다. 이후 그는 일에 의욕을 보이지 않고 멍한 사람처럼 지냈다. 뇌 사진을 찍어보니 저산소증으로 전두엽에 이상이 나타나 치매가 생겼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뇌는 근육이 아니므로 노력해도 뇌세포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뇌도 노력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이를 뇌유연성(brain plasticity)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듣고, 행동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뇌세포가 변한다는 의미이다. 영국 런던 대학의 엘리노어 맥과이어 박사는 런던 택시 운전사들의 뇌 구조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살폈다. 런던에서 택시 운전을 하려면 수천 개의 장소를 헤매지 않고 찾는 훈련을 마쳐야 한다. 약 2년 동안 길 찾기 훈련을 마친 런던 택시 운전사들의 해마 뒷부분은 일반인보다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길 찾기 훈련으로 뇌세포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2004년 과학 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더욱 놀랍다. 20대 일반인들에게 3개월 동안 서커스 저글링을 연습시켰다. 이 사람들의 뇌를 연습 전과 후에 촬영했더니 뇌피질이 두꺼워졌다. 저글링을 했던 사람을 3개월 동안 연습하지 못하게 한 후에는 뇌피질의 두께가 다시 원상태로 얇아졌다.


어떻게 전두엽을 발달시켜 ‘예쁜 치매’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저자가 제시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면 이렇다.

 

TV 대신 책 읽기
영화 ‘해리포터’를 보면 영상 정보를 뒤쪽 뇌가 받아들이는 데에 그친다. 그러나 ‘해리포터’를 책으로 읽으면 뇌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뒤쪽 뇌로 입수된 정보가 끊임없이 앞쪽 뇌로 전달되고 장면과 인물 심리 등을 유추하느라 전두엽이 활성화된다.

 

쓰기
편지·일기 쓰기 등도 앞쪽 뇌 활성화에 좋다. 단순히 글을 베끼는 것은 뒤쪽 뇌가 관장하지만 문장을 생각하고 구성하고 표현하는 것은 앞쪽 뇌의 담당이다.

 

발표하기
듣는 것은 뒤쪽 뇌, 표현하는 것은 앞쪽 뇌가 관여한다. 친구들과 나누는 가벼운 대화는 제한된 단어와 표현을 사용하므로 효과가 덜하다. 그러나 연설이나 발표는 앞쪽 뇌를 강하게 자극한다. 말수 자체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다.

 

외국어 사용
쓰고 말하기를 모국어보다 외국어로 하면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더 넓다. 모국어를 사용할 때는 왼쪽 뇌만 사용하지만 외국어를 말할 때는 오른쪽 뇌까지 활성화된다.

 

창작 활동
시, 소설, 시나리오 쓰기, 작사나 작곡, 게임 개발, 조각, 디자인, 설계 등 창작 활동은 전두엽을 자극한다.

 

시간 관리
뇌에는 시계 능력이 있는데 단순히 하나, 둘, 셋 등으로 숫자를 세는 일에는 작은골(소뇌)이나 바닥핵(basal ganglia)이 관여한다. 어떤 일을 하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는 것은 앞쪽 뇌의 몫이다. 앞쪽 뇌는 뇌 안의 시계와 외부 시계를 이용해 시간 관리를 한다. 시간 관리를 잘해서 앞쪽 뇌가 활성화되는지, 앞쪽 뇌가 좋아서 시간 관리를 잘하는 것인지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평소 시간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앞쪽 뇌가 발달한다.

 

계획 세우기
앞쪽 뇌가 손상된 사람은 계획을 세우거나 일의 순서를 정하더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과 쾌락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계획이란 급한 것과 덜 급한 것,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따라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의 경중을 따져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앞쪽 뇌 발달에 좋다.

 

결단력 키우기
어떤 정보를 수집한 다음 편집하고 종합해 최종 결론을 내리는 작업은 앞쪽 뇌를 활성화시킨다. 바둑을 둘 때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결정하는데 이럴 때 앞쪽 뇌 기능이 증진된다. 그러나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와 같은 단순 결정은 예외다.

 

논리력 키우기
논리적인 사고 역시 앞쪽 뇌를 활성화한다. 학생들이 논술문을 쓰거나 판사가 판결문을 쓰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토론하기도 좋은 방법이다.

 

예측 기능
직장인이 몇 달 또는 몇 년 앞을 예측해 계획을 짜는 것은 전두엽 발달에 좋다. 명절 때 고향을 가기 위해 언제, 어떻게 이동하는 것이 좋을지 예상하는 것, 여행할 때 여행 기간의 일정을 고려해 알맞게 짐을 꾸리는 것, 한 달 생활비를 계획하는 것, 자녀 교육, 내 집 마련을 위해 저축이나 보험을 들어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일상생활에서 앞쪽 뇌를 활성화하는 방법이다.

 

내 마음 모니터링하기
어떤 사람은 입만 떼면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런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더 심한 험담을 한다. 평소 자신을 보는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로 바뀌면서 앞쪽 뇌가 강력하게 발달한다.

 

이 책의 1부는 앞쪽 뇌가 손상된 환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앞쪽 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부는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앞쪽 뇌를 활성화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3부에는 진정한 의미의 앞쪽형 인간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이 담겨 있다. 전문가의 지식은 오랜 세월 동안 연구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쌓인 것인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거의 공짜를 얻는 방법은 책이다. 이런 면에서 치매 전문가 나 교수의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이 책을 읽는 것은 궤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은 행운이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공감 NECA>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