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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36 5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의사와 환자가 신뢰를 쌓는 또 다른 방법 -의사다운 의사를 고민한 책 <가운을 벗자>





글. 노진섭 의학기자 (시사저널)



2011년 2월 설 연휴를 마치고 출근했더니 책상에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하얀색 표지에 ‘가운을 벗자’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독서를 즐기는 필자에게 책 선물은 가벼운 흥분을 준다. 저자는 임재준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다. 당시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교수가 책 선물을 보내온 것에 고마움을 느껴 전화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책 제목에 ‘가운’이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얀색 가운은 의사의 상징과도 같다. 가운은 의료인이라는 의미를 풍기며 가운의 주머니 크기는 청진기나 의학책을 넣기에 충분하다. 또 흰색 때문인지 위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임 교수는 진료할 때 가운을 잘 입지 않는다. 넥타이도 매지 않고 신발도 편한 것을 신는다. 진료실을 벗어나면 의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저자는 가운을 벗으라고 계몽한다. 보기에 따라 가운은 권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가운 증후군이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앞에서 환자가 긴장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또 의사가 사용하는 가운과 넥타이에 많은 세균이 있기도 하다. 결국 가운은 생각처럼 위생적이지도,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는 있어서 환자들이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그렇지 않은 의사보다 전문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저자는 가운의 부정적인 영향에 주목한 듯하다. 책의 제목 ‘가운을 벗자’는 말은 의사의 권위를 내려놓자는 의미와 상통한다. 


필자가 몇 년 전 만났던 한 환자는 이런 말을 했다. “저 의사는 대한민국에서 이 분야 최고다. 그래서 치료를 그에게 맡겼고, 나는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의사에게 50점밖에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사는 환자인 나에게 한 번도 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사는 암 수술을 참 잘한다. 3cm 암을 없애기 위해 암 크기보다 몇 배나 크게 주변 조직을 잘라내고, 혹시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작은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도 병행한다. 환자는 암에서 완치된다. 이 의사는 암 수술 권위자라는 명예를 얻는다. 그런데 그 환자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 암에서 해방되었지만 독한 방사선과 항암제로 정상 세포가 파괴되어 환자는 비실거리다 유명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두 사례의 의사는 훌륭한 의사일까. 질병을 고친다는 의사의 본분을 실행한 점은 흠잡을 곳이 없다. 뛰어난 연구, 풍부한 임상 경험 등으로 병을 치료해 환자가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환자의 시각은 다르다. 병을 잘 고치기로 유명한 의사인데도 정작 환자는 그 의사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시쳇말로 의사가 질병만 보고 환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시대가 요구하는 의사의 모습을 이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좋은 치료 결과를 얻기 위해 환자가 의사에게 보내야 할 것이 신뢰라면, 반대로 의사가 환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공감(共感)이다." 


건강검진은 자주 입방아에 오른다. 병원의 돈벌이 수단이라는 것이다. 건강검진은 병을 조기에 발견하기에 훌륭한 방법이다.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해야 효과가 좋은 병들이 많다. 특히 암은 늦게 발견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낮아진다. 그러나 굳이 일찍 발견하지 않아도 되는 질병도 있다. 예컨대, 암과 유사한 혹이 있다고 하자. 가만 놔두면 저절로 사라지거나 평생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인데 건강검진에서 발견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화목하던 가정은 졸지에 불행의 늪으로 빠진다. 모르고 지나칠 것을 발견했으니 수술해야 직성이 풀린다. 수술하면 환자의 면역력은 최악에 이르고, 다른 질병에 걸리기 쉬운 몸 상태가 된다. 그렇다고 건강검진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너무 자세히, 불필요하게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저자는 이 책에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화려한 모양의 달콤한 맛을 무기로 우리를 유혹하는 이런저런 커피를 주문해 마시면 원하는 상쾌한 각성 효과를 얻는 대신, 호주머니를 털리는 것은 물론이고 고칼로리 덕분에 살만 찌게 된다. 건강검진도 비슷하다. 기본 프로그램에 이것저것을 추가하면 비용도 많이 드는 데다 머리 아픈 일만 커지게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환자는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몸에 좋다는 것을 먹는다. 무슨 버섯이니 나무뿌리니 하는 것을 먹고 병이 낫기를 바란다. 병이 낫는다면 무엇인들 먹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의사들은 다 안다.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음식은 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 우려가 있다는 점을 말이다. 의사는 이런 내용을 국민에게 알려 국민이 건강기능식품이나 특정 음식을 맹신하지 않도록 계몽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 의사는 그런 말을 언론에 대놓고 하기를 꺼린다. 연구 결과가 없거나, 귀찮거나, 건강기능식품을 만드는 기업으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는 소의(小醫)이고, 환자를 치료하면 중의(中醫)이며, 사회를 치료하는 의사가 대의(大醫)다.” 환자를 병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더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어야 훌륭한 의사라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병을 잘 고친 두 사례 속 의사는 소의다. 기계를 고치는 엔지니어와 의사는 다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병을 고치되 그 환자의 삶도 살펴야 하는 이유다. 최근 의학계에는 삶의 질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의사들은 적극적인 치료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동료 의사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책처럼 보인다. 그런데 책 구성을 찬찬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의학을 통해 본 세상’이라는 작은 제목을 단 1장에는 유방 확대수술이나 비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3장(유전자 혹은 필자)과 4장(상식 밖의 의학)에도 일반인들이 읽으면 유익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동료 의사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내용은 2장에 있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에게 병원, 의사, 질병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했다. 예컨대 젊은 아빠와 늙은 아빠의 차이는 무엇 때문인지,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가 왜 다른 성격을 보이는지, 기도가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등을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설명한다. 게다가 어려운 의학 용어를 최대한 배제해 일반인의 이해를 도운 흔적이 보인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가운 속에 감춰진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빛나는 것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공의는 36시간을 연속 근무하고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화젯거리도 아니다. 의사 절반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등 삶의 질이 좋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 설문조사에서 의사 263명 중 108명은 다시 태어나도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답했고, 자녀가 의사가 되는 것을 권유하겠느냐는 질문에 137명이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TV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기도가 질병 치유에 효과가 있는지, 성공한 사람이 정말 오래 사는지에 대한 내용도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자신의 임상 경험과 수많은 연구 논문을 근거로 이 책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쓴 책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독자가 많다. 한마디로 의사가 쓴 책은 재미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기껏해야 질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안내서 정도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게다가 '환자는 의사의 말만 따르면 된다'는 식의 책이라면 최악이다. 


이 책에는 현역 의사가 ‘의사다운 의사’를 고민한 흔적이 짙다. 저자는 일반인이 잘 모르는 의사, 병원, 의료에 대한 것들을 이 책에 풀어놓았다. 일반인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의사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이다. 책의 제목이 ‘가운을 벗자’인 이유다. 필자는 이 책을 매개로 현재까지 임 교수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임 교수는 지금도 가운을 입지 않고 진료를 본다. 최근에는 ‘초진 환자 15분 진료’를 실천하고 있다. 짧은 진료 시간을 최소한 15분으로 늘려야 한다는 취지다. 그 실천 결과도 책으로 내놓으면 좋겠다. 필자 책상 위에 또 다른 책 택배 상자가 놓여 있으면 더 좋겠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공감 NECA>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