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주환 (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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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영역엔 프로슈머(Prosumer)란 말이 있다.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는 현상에 천착한 표현이다. 신형 차의 개발과 무료 시승, 새로운 소프트웨어의 베타버전 무료 사용 등을 통해 생산자는 정식으로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사용에 최적인 상품을 생산하고 확산하기 위해 소비자를 적극 참여시킨다.


공공영역에서는, 특히 근거생성의 영역에서 이런 프로슈머의 역할이 없을까?


언뜻 보기에는 어렵게 느껴지는 근거생성 영역에서 환자 및 일반인은 소극적인 소비자이어야만 할까? 보건의료기술의 근거생성에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활용되므로 이런 지식이 없는 환자나 일반인은 일반시장에서의 프로슈머와 동등한 역할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건 옳은 주장일까?


과연 자동차 생산,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생산에 필요한 모든 전문적 지식을 다 알아야만 프로슈머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모든 상품과 서비스 생산에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영역이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상품과 서비스의 최적의 유통을 위해) 이런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은 비전문가 소비자의 참여 요구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소비자는 누구인가? 생산될 상품과 서비스의 필요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집단이다. 아니 누구보다 절실한(!) 집단이다. 또한 그 비용을 지불하기 될 원천적인 집단이기도 하다(가난한 사회 구성원을 위한 사회적 지원 제도가 있다고 해도 일반인구집단은 전체 생산 비용을 보상하기 위한 재원조달과정의 근본적 시작점이란 점에서 특히 그렇다).


전문적 지식이 없는 환자 또는 일반인이 고도의 전문적 근거를 생산하는 지식산업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음 질문으로, 그렇다면 과연 이런 참여가 현존하고 있을까?


아직 모든 국가가 이런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으나, 적지 않은 수의 국가에서 이런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NICE(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라는 의료기술평가기관에서 임상치료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과정에 전문가의 다양한 역할과 더불어 환자 또는 일반인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존의 치료방법에서 환자의 어려움이나 불편함, 불만족 요소가 새로운 서비스 또는 상품의 출현과 사용권고 과정에서 어떻게 개선되었고, 실제 사용과정에서 어떤 기대 효과 혹은 기대되지 않는 효과이나 필연적, 확률적으로 사용자 중 일부에 생길 수 있는 효과 등을 환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 사회적으로 그 비용을 공동으로 책임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판단에 참여한다.


제도적으로는 NICE의 위원회에서 하나의 임상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는 데 최소 2인의 일반인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여러 임상가이드라인이나 정책방향을 정하는데 30명의 일반인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최신지식에 기반하여 주어진 사회적 질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이들은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준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축적한 소위 엘리트 시민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제도의 배심원처럼 완전히 해당 분야 비전문가인 평범한 일반인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일반인들이 전문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까지 어려움을 최소화하는 일에 집중 지원되는 전문 인력(석박사급)만도 10명에 가까울 정도이다.


노르웨이에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보건의료서비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환자 또는 일반인이 최종결정위원회(임상전문가, 윤리전문가, 입법의회의원 등이 구성원)에 참여하고 있다. 환자단체로부터 추천된 인사가 이 위원회에 참석하는데, 참여의 지위로만 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권한이 부여되고 있다.


전 세계 선진국들에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기술의 사회적 생산과 활용”에 비전문가인 환자 또는 일반인을 초대하여 적극적으로 역할을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상의료의 국가로 유명한 영국에서는 1999년 NICE를 설립했다. 설립취지문을 살펴보면 ‘효과가 있는 모든 의료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 있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회가 현존하는 모든 기술을 전 국민을 위해 사용할 만큼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현실의 인정에서 출발한다. 노르웨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우 부유한 국가이지만, 동시에 모든 희망사항을 다 사회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점과 더불어, 의료기술(특히, 새롭게 개발되는 의료기술)의 사회적인 채택과 전 국민적인 활용에서 자원의 유한함으로 사회적 생산과 활용에 대하여 쉽지 않은 중대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사회의 주인이자 해당 서비스의 확률적, 실질적 사용자인 환자 또는 일반인을 적극적으로 전문지식에 기반한 근거생성과 활용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 모두에게 모든 새로운 의료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면, 어떤 기술을 생산하고 채택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가치판단은 기술적 전문성과는 다른 차원의 결정이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비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주인인 모든 일반 국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봉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국제사회는 이러한 형태의 일반인 참여 가치를 '절차적 정당성/정의(Procedural Justice)', '숙고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참여적 의사결정(Participatory Decision)'과 같은 새로운 어휘를 활용해 담아내고 있다.


환자나 일반인 참여의 과정에 어려움은 없을까?


이들의 현실적 지위를 얼마나 높게 인정하는 가에 따라 그 어려움의 정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무늬만 참여인 방식으로 운영할 경우, 사실 일반인은 전문가의 언어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질문하기도 어려운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기존의 일반인 참여과정에서 나타났던 문제점이다. 소위 일상어(Plain Language)를 통한 소통 노력이 제공되고, 전문가가 일반인을 위해 철저히 지원하는 형식의 높은 지위인정 체계에 가까울수록 그 어려움이 적어진다.


아울러, 참여하는 일반인들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 관점에서 발언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요구된다. 환자에 대한 정보제공자일 때에는 철저히 해당 환자의 필요성을 적극 설명하지만, 사회적 자원사용의 결정에 관해서는 자원의 유한함을 전제로 모든 사회적인 경쟁과 필요성을 고려하여 해당 문제의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방식의 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사적인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집단 전체의 이해를 위해 참여하는 것의 철학적 기초는 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묘사에 근접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환자 및 일반인 참여는 바람직하나,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런 참여가 갖는 가치를 확인할수록 이를 통한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욱 더 제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운영방식을 창안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신의료기술평가 과정에 환자나 일반인을 참여시키는 제도가 마련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의료기술의 사회적 비용부담 결정(보험급여화)에 관한 일반인 참여는 2012년 건강보험공단의 국민참여위원회를 통해 현재까지 5회에 걸쳐 이루어진 바가 있다.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최근 국민참여위원회의 권고결의사항 중 아동의 입원서비스에 대한 보험급여를 다른 서비스보다 더 적은 본인부담금(5%)을 적용하도록 대상 연령기준을 현행의 6세에서 15세까지 확대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이 권고안은 무상(본인부담금 0%)으로 제공하자는 주장에 대한 국민참여적 검토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결정은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비교적 경미한 상태 혹은 어느 정도 치료가 종결된 어린이의 입원병상 점유로 중대한 입원 필요성이 있는 환아들이 치료기회를 놓칠 위험이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기전으로 현재 우리의 의료이용 정서상 약간이라도 본인부담금을 부여함으로써 비용인식을 두어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이다.


이런 취지는 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이 캠프에 대한 지지그룹의 다수는 무상의료를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 참여로 이루어진 국민참여위원회 권고안인 5% 본인부담금으로 낮추는 아동입원보험급여 확대를 후보당시 공약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제 한국사회는 의료기술평가와 임상진료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과정에 환자와 일반인을 적극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조치의 사회적 이익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비용에 비해 그 유익이 클 것이다.


환자는 새로운 의료기술에 대한 필요(need)의 근원이며, 확률적(미래), 실체적(현재) 환자인 국민들은 그 비용을 최종적으로 감당할 주체이자 동시에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다. 이런 환자와 일반인이 주요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상한 일이 아니라 (특별할 것도 없는) 매우 정상적인 일인 셈이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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