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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2 11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연말, 죽음을 말할 시간 - 도서 <의사들 죽음을 말하다>

hi_neca 2016. 11. 24. 13:46




 

글. 노진섭 의학기자 (시사저널)


‘의사들, 죽음을 말하다’는 제목 그대로 전·현직 의사 3명(김건열, 정현채, 유은실)이 죽음에 관해 쓴 책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을 맞아 이 책을 의료인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권하고 싶다. 우리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기는 꺼리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이가 언젠가는 맞이할 운명이다. 그러나 죽음을 입에 담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성(性)과 성행위를 동물적인 욕망으로 보고 불경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섹시하다는 말이 날씬하고 건강하다는 의미의 칭찬일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유독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책에서는 그 이유를 전통적 유교 문화에서 찾고 있다.


“비교종교학자인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우리의 죽음 문화가 지금과 같이 된 것은 유교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합니다. 조선 왕조 600년 동안 내세관이 없는 유교가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187쪽)


죽음을 맞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6년 전 40대 남성이 구급차에 실려 서울대병원으로 들어왔다. 지방 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았지만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졌기 때문에 가망이 없었다. 대학병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들은 가족들은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그 사이에 환자의 숨소리는 멈췄다.


2년 전에는 간암 말기의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가 현대 의학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연명치료 중단을 결심했다. 의식은 없어도 청각과 촉각은 끝까지 남는다는 말에 아내는 힘없이 누워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귀엣말로 사랑을 속삭였다. 그제야 남편은 고통으로 찡그린 얼굴을 펴고 편안한 표정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이 두 사례 중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물론 응급 상황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더라도 심폐소생술을 하고, 치아·성대를 다치더라도 기도삽관을 해서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자칫 고통만 가중할 수 있다.


1997년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환자를 가족의 요청에 따라 퇴원 조치한 보라매병원 의료진에게 살인 방조죄로 유죄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비슷한 경우가 2009년에 발생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할머니의 가족이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했지만 의료진은 거부했다. 자칫 보라매병원 사례가 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 가족은 연명치료 중단 소송까지 냈고, 이를 법원이 받아들였다.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에 호스피스·연명 의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관련법도 마련됐다.


‘호스피스·연명 의료법’이 2017년 8월부터 시행된다. 질병 치료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포기가 아닌 전인적인 돌봄을 골자로 한 법이다. 물론 ‘현대판 고려장’이나 생명 경시 풍조가 생길 수 있으므로 대비책을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


이 법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죽음에 대한 우리 국민의 성숙함이 있다. 실제로 국민 10명 중 7명은 말기 호스피스를 이용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윤영호(서울대 의과대학)·이근석(국립암센터) 교수팀은 호스피스·연명의료법 시행을 1년 앞둔 현시점에서 국민 1,241명과 의사 859명을 조사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호스피스 및 완화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의향이 있는 국민은 전체 조사대상자 중 73.3%인 것으로 조사됐다. 의사의 경우는 이보다 높은 98.7%로 집계됐다.


그러나 사전 연명의료계획서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은 아직 대다수 국민이 모른다.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알고 있는 국민은 15.6%로 의사(60.8%)와 비교하면 약 4분의 1에 불과했다. 연구를 총괄한 윤영호 교수는 “정부는 이번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법이 시행되기 전에 호스피스와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적정 수요를 예측해야 한다”며, “사전의료계획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한 대국민 홍보 전략을 구축하고 범부처 웰다잉 종합계획을 수립해 앞으로 국민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데 큰 혼란이 없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살아 있을 때 연명의료에 대한 생각을 해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평소 가족에게 밝혀놓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사전의료의향서를 써 놨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배우자가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환자가 임종기에 들어서면 인공호흡기와 같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분명히 의향서에 작성해 놓았는데도 배우자가 나서서 인공호흡기를 걸라고 해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서류를 써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상시 자주 대화를 해서 가족에게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혀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195쪽)


과거 서울에 묘지가 듬성듬성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묘지는 교외로 이전되고 묘지가 떠난 자리에 건물들이 들어섰다. 공동묘지는 혐오시설로 여겨지면서 주택가 근처에서 퇴출당한 지 오래다. 그러나 묘지는 자신의 미래다. 그 미래를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모퉁이를 돌면 죽음이 있지만 우리는 평소 죽음에 대한 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Pixabay


“2009년 8월 헌법재판소에서 학교 주변에 납골당 건축을 불허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사회가 아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더 크기 때문이며,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하는데 검은 옷 입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건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187쪽)


이 책은 한 미국 심리학자의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며 묘지나 죽음이 주는 순기능을 설명한다.


“묘지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위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고도 하는데요. 어떤 사람이 노트북을 들고 있다가 떨어뜨릴 때 누가 더 많이 도와주는가를 조사했더니 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 공간에 있는 사람들보다 40%나 더 많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묘지에서 사람들은 그만큼 남에 대한 배려심이 깊어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공동묘지를 정기적으로 산책하는 사람은 낯선 나그네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높아짐으로써 인내심, 평등의식, 연민, 감정이입과 평화주의에 대한 동기부여가 이루어져 그럴 거라는 거죠.” (189쪽)


필자는 몇 해 전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도심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를 찾았다. 이 묘지는 모파상·보들레르 등 유명 문학인과 일반인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다. 큰 대문을 통과해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서자 도심의 번잡스러움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묘지에 있는 사람들은 산책하고 휴식을 취했다. 묘지라기보다는 공원 같았다. 파리지앵은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은 ‘우리는 묘지가 일상 가까이에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하다’라고 얘기했는데 그 말에 정말 공감합니다.” (189쪽)


2011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죽음을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사고나 늙어서 죽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으로 죽음을 접하도록 교육한다. 죽음에 대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죽음학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유은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는 “10대 이후부터는 나이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야한다”며 “자동차 안전벨트 착용이 짧은 시간에 정착된 것처럼, 죽음 교육도 한 번 불이 붙으면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1400명의 사상자를 남긴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일로 가보자. 1995년 6월 그날 오후 30대 여성 이승연 씨는 빵을 사기 위해 그 백화점 지하에 있는 제과점에 들렀다. 사고 싶은 빵이 없어서 빈손으로 백화점을 빠져나온 순간 건물은 굉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이씨는 “5분만 지체했다면 큰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며 “우리는 보통 70~80세까지 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 죽음은 불현듯 내게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 경험은 이 씨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짐 정리였다. 마치 여행 왔다 가는 것처럼 남은 삶은 단출하게 살기로 했다. 사고 이후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사소한 것에 욕심내지 않고 중요한 것에만 힘을 쏟다 보니 하루하루가 소중해졌다.


삶을 보람 있게 사는 것이 웰빙(well being)이다. 웰빙은 아름다 죽음을 맞이하는 웰다잉(well dying)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노성훈 연세의료원 암병원장은 “며칠 여행을 갈 때도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고, 가족에게 문단속 잘하라는 등의 당부도 한다. 하물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면서도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 잘 준비하는 것이 웰빙이고 이는 웰다잉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은 후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이란 책을 쓴 미국 의사 아이라 바이오크가 말한 죽기 전 해야 할 일 네 가지를 떠올렸다.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할 것,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것, 작별인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연말연시는 가족과 죽음에 대한 건강한 대화를 나눠보기에 적절한 시기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