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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1 창간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 이야기




   글. 성용원(보라매병원 흉부외과)



최근 우리나라에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추위 속에서 마음을 따뜻해지게 해주는 영화 한편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2004년에 제작 발표된 'Something the Lord Made' (신이 만드신 것) 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에서 심장에 대한 외과적인 수술을 최초로 시작한 백인 의사인 알프레드 블레이락 (Alfred Blalock)과 흑인으로서 그의 연구조교이자 인생의 파트너, 친구였던 비비안 토마스(Vivien Thomas)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들은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하였던 1930년부터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낸 연구와 수술들을 성공시켜왔으며, 결국 심장외과학 분야가 설립되고 발전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영화에 대한 줄거리도 비슷하겠지만 당시 시대상황과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관계, 그리고 위대함에 대해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백인인 알프레드 블레이락은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대지주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주변에서 "블레이락 집안이 어디죠?" 라고 지나가던 누구에게 물어도 모두들 알 정도로 부유하고 명망있는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으나, 알프레드 블레이락은 의학을 공부하기를 원하여 명문인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존스 홉킨스에 남기를 원했던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는 좌천되다시피 테네시주 내쉬빌의 밴더빌트(Vanderbilt) 의과대학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꿈과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연구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진합니다.

 

흑인인 비비안 토마스는 루이지애나주에서 수석 목수로 일하다 테네시주 내쉬빌로 옮겨온 아버지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흑인사회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당시 내쉬빌이란 도시는 보수적인 미국 남부의 도시로 흑인사회와 백인사회가 격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끼리 모여 살며 중산층을 이루기도 하며 변호사, 의사, 교수를 꿈꾸던 도시였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의사를 꿈꾸며 목수로서 꾸준히 봉급을 저축하던 비비안 토마스는 갑자기 미국에 닥친 대공황으로 인해 의대에 가기 위해 7년동안 모은 저축을 1930년에 모두 잃게 됩니다.

 

이후 마땅한 목수 일자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19세의 소년 비비안 토마스는 밴더빌트 의과대학의 연구소에 수위(janitor)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를 고용한 알프레드 블레이락은 가르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력을 원하고 있었고, 비비안 토마스의 명석한 두뇌와 놀라운 손재주를 보고 그를 매우 인정하게 됩니다. 몇 주 뒤 19세의 소년은 실험도구를 준비할 뿐 아니라 실험동물의 마취, 투약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세한 연구 노트까지 기록하게 될 뿐 아니라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게 됩니다.


 

알프레드 블레이락은 이 당시 외상성 쇼크(traumatic shock) 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 실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비안 토마스는 수술 술기까지 익히게 됩니다. 이 당시 모든 쇼크는 몸에서 분비된 독소(toxin)에 의한 혈관 확장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블레이락은 그의 실험에서 얻은 결과인 외상성 쇼크는 수액 투여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발표하였고, 이는 당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군인을 살리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 업적으로 알프레드 블레이락은 모교인 존스 홉킨스로부터 외과 과장으로 취임해달라는 권유를 받게 됩니다. 블레이락은 자신과 비비안 토마스를 함께 데려가주는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존스 홉킨스에 필수 조건으로 내세웠고, 비비안 토마스를 설득하여 함께 가게 됩니다. 11년동안이나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연구에 참여했던 비비안 토마스였지만, 밴더빌트 대학을 그만 두는 순간까지 그의 직위는 수위(janitor)였습니다.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그는 블레이락 실험실의 모든 셋팅과 운영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0년대 당시의 존스 홉킨스는 매우 고지식하고 완고할 뿐 아니라 흑인에 대한 차별 또한 심했습니다. 백인들로만, 그것도 주로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의사들의 경우에는 직위에 따라 흰 가운의 길이를 다르게 하여 차별하였으며, 흑인들의 경우에는 잡역을 맡은 경우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연구소의 비비안 토마스는 매우 신기한 존재였고, 그가 흰 가운을 입고 지나가면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멈추어 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홉킨스는 매우 엄격하게 비비안 토마스의 행동을 제약하여 그는 실험실도 뒷문으로 다녀야 했으며, 식당 뿐 아니라 화장실도 흑인전용만 다녀야 했습니다. 블레이락은 당시 진료 및 수술로 매운 바쁜 상태로 모든 실험실 연구 및 실험동물의 수술은 비비안 토마스가 담당하게 되었고, 그는 또한 뛰어난 손재주를 최대한 이용하여 혈관 클램프(vascular clamp)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수술 도구들도 개발하였고, 혈관을 봉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바늘까지 직접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 무렵 당시에는 희귀하던 여성 교수였던 소아 심장내과를 담당하였던 헬렌 타우식(Helen Taussig)이 블레이락에게 매우 획기적인 제안을 하게 됩니다. 불치병으로 알려졌던 소아의 선천성 심장병인 팔로씨 사징(Tetralogy of Fallot)을 그녀는 내과적으로 치료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이에 대한 수술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블레이락은 이를 수용하였고, 당시 나날이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아일린 색슨(Eileen Saxon)이라는 소녀에 대한 수술을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아직도 라틴어로 "Noli tangere (Do not touch, 건드리지 말것)" 이라는 심장에 대한 의학계의 터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한 주변의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200회 이상 개를 수술하여 팔로씨 사징과 같은 기형 상태를 유발하는데 먼저 성공하였고, 이후에는 폐동맥 협착으로 인해 폐에 피가 가지 못해 생기는 저산소증을 치료하기 위해 쇄골하동맥을 폐동맥에 봉합하여 혈류가 가게해주는 단락술을 개발하여 이를 애나(Anna)라고 불리던 개에게 적용, 성공하게 됩니다. 

애나는 장기간 생존하게 되었고, 현재 존스 홉킨스 의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의 초상화가 애나의 초상화라고 합니다.

 Anna의 초상화 



여러번의 실험에서 높은 성공을 거둔 후, 1944년 11월 29일 블레이락은 아일린 색슨을 결국 수술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동물 수술을 비비안 토마스가 성공하여 더욱 경험이 많았었기 때문에 블레이락의 강력한 주장으로 홉킨스 역사상 최초로 흑인인 비비안 토마스는 블레이락 바로 뒤에 서서 수술에 대해 조언을 하게 되고, 이 첫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를 비롯한 첫 세 건의 수술의 성공이 발표되어 전 세계의 수많은 팔로씨 사징 환아들이 존스 홉킨스로 밀려들었고, 첫 100여건을 수술하는 데 항상 비비안 토마스는 블레이락과 함께하였다고 합니다.






세계 첫 심장 수술의 성공으로 이 쇄골하동맥-폐동맥 단락술은 블레이락-타우식 단락술(Blalock-Taussig shunt)로 불리게 됩니다. 이 수술에 비비안 토마스가 기여한 바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수술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업적은 흑인인 그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묻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봉급도 전혀 인상되지 않아 봉급 문제로 인해 블레이락과 몇차례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블레이락이 학교측에 주장하여 인상해 주게 되었습니다. 


블레이락은 자신이 일일히 직접 선발하였던 모든 외과 레지던트들이 비비안 토마스에게 외과적인 수술 술기를 필수로 배우도록 하였고, 이 레지던트들 중 유명한 덴튼 쿨리(Denton Cooley, 세계 최초로 인공심장 이식에 성공) 등 많은 사람들이 향후 심장 수술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낮에는 이들에게 수술을 가르치던 선생님인 비비안 토마스는 흑인에 대한 차별로 인해 월급이 더 필요하여 저녁에는 블레이락의 파티에서 바텐더로 이들을 서빙하는 아이러니칼한 생활을 계속하였고, 심지어 전세계 수많은 인사들이 참여했던 블레이락의 60세되던 생일파티에는 안타깝게도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들 둘의 인생의 파트너쉽과 서로를 의지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실험실에서 블레이락과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구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위스키를 마시는 등, 바깥의 사회적 차별 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과 우정이 이들 사이에는 있었습니다. 


이후 블레이락이 1964년 정년퇴임 4개월 후 먼저 65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블레이락의 사망 이후부터야 흑인에 대한 대우가 존스 홉킨스 스스로의 노력으로 호전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비비안 토마스는 블레이락 사후 15년간 존스 홉킨스에서 교육에 계속 힘썼고 특히 존스 홉킨스에 첫 흑인 의대생과 외과 레지던트가 부임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고, 자신의 조카인 코코 이튼스 또한 존스 홉킨스에 의대생으로 입학하는 데 기여합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세계 최초의 심장외과 여의사 중 하나인 로위나 스펜서도 있었습니다.



 1969년에는 쿨리, 롱마이어 등을 비롯한 블레이락의 제자들의 모임인 올드 핸즈 클럽(Old Hands. Club)이 홉킨스에서 비비안 토마스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의 초상화를 기증하고, 이를 홉킨스에 전시된 블레이락의 초상화 옆에 걸도록 하였으며 1976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그에게 명예 박스 학위를 수여하게 됩니다.

그는 1979년에 은퇴하여 1985년에 사망하게 되고, 바로 그의 자서전이 출간됩니다.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크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가 1989년에 워싱턴 매거진의 기사에서 크게 알려지게 되어 이후 TV제작자인 안드레아 칼린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고,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도 칼린은 직접 제작사를 만들어 제작해야 되었고, 후원금이 계속 도중에 끊기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비비안 토마스의 자서전      

 

       


 











                           <존스 홉킨스에 전시된 블레이락과 토마스의 초상화>



블레이락은 흑인에 대해 차별이 더욱 심하였던 남부 출신임에도 재능있던 비비안 토마스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를 동료이자 친구로 인정하고 함께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비비안 토마스는 열악하기 그지없던 흑인에 대한 멸시와 차대 속에서도 의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기술로 심장 외과학이 수립되는데 기여하였고,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였습니다. 헬렌 타우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입학을 거부당했으며, 어렸을 때 병으로 인해 거의 귀머거리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여 요즈음의 심장초음파 같은 진단 장치 없이 특별히 개발한 청진기로 진료하여 수많은 아이들을 살리는 데 기여하였고, 이후 thalidomide라는 약이 신생아의 기형증인 바다표범손발증을 유발하는 것을 밝히고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좌측부터 Alfred Blalock, Vivien Thomas, Helen Taussig>

 

이들의 위대한 인간성과 밤낮 없는 노력, 그리고 수많은 실험을 통해 희생된 동물들을 통해 획득한 과학적 지식과 근거가 있었기에 의학의 큰 발전이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낮이든 밤이든, 어떠한 환경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살리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은 대한민국 뿐 아닌 세계 어디서도 계속 시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 닥터 블레이락이 수술부위를 점검했습니다


 비비안, 이거 자네가 봉합한게 확실한가? 이건 마치 신이 해놓으신 것 같네
 (Something the Lord m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