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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26 7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기억이 사라져도, 나는 여전히 살아갑니다- 영화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글. 신동욱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평생 동안, 저는 기억을 모아왔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저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었지요.
제 남편을 처음 만난 그 밤,
제가 처음 저의 책을 손에 쥐게 된 날,
아이들을 낳고... 친구를 만들고... 세계를 여행하고
내가 삶에서 모아온 모든 것들, 내가 너무나 열심히 모아온 것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지요.”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의 성공적인 신경언어학 교수, 유능한 연구자이자 다정다감한 남편의 아내, 잘 자라 성인이 된 세 자녀의 어머니. 남부러울 것 없는 50세 상류 백인 여성 앨리스(Julianne Moore분). 아무것도 더 부러울 것 없는 그녀의 완벽한 일상에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 치매(Early Onset Alzheimer Dementia, 이하 편의상 조기 치매라고 칭함). 
 

<앨리스의 50번째 생일파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강의 중 단어가 생각이 안나고 저녁 약속을 깜빡하기 시작하다가, 내가 어디 있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더니, 가족들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앨리스의 삶은, 원래의 완벽한 삶과 극명히 대비되면서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강의중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는 앨리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조깅 도중 길을 잃고 당황하는 앨리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스틸 앨리스>는 치매를 소재로 다룬 이전의 여러 영화들과 달리, 병으로 인한 비극이나 가족애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가 치매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신경언어학자로 설정된 앨리스가 조금씩 기억을 상실해나가면서 자신의 기억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차분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병이 한참 진행된 상태에서 3일 꼬박 원고를 준비하여 알츠하이머 협회에 나가 줄을 치면서 원고를 연설하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는 감동적이다.

 

<치매협회에서 연설하는 앨리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저는 이런 것들을 기억 못하는 제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인생에 행복한 날들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고통 받고 있다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의 부분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옛날의 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현재에 충실히 살자' 라고 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에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내가 잃는 방법에 대해 통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허나 제가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하나는, 오늘 여기서 했었던 연설이겠지요. 이 기억은 사라질거에요. 사라지겠죠. 내일이면 까맣게 잊을지 몰라요.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게 매우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에 매료되어 굉장히 열정적이었던 옛날의 제 자신처럼요.
이러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는 이것이 세상을 의미해요.”

 

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의료 윤리의 측면에서 두 가지 이슈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슈는 치매와 같이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환자에서의 ‘의사 결정의 자율성(patient autonomy)’에 대한 문제이다.

 

치매 진단 후 아직 병세가 많이 진행되기 전, 앨리스는 치매환자들의 요양원을 찾아 치매 환자들을 만난다. 이후 의사에게 잠이 안온다고 하면서 강한 수면제를 처방 받는다. 그리고서는 나중에 기본적인 것도 기억 못할 때가 될 때를 대비해, 스스로에게 동영상 메시지를 남긴다. 그 메시지는 자살 방법이다.

 

<병이 심해졌을 때 볼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앨리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안녕 앨리스. 나는 너고, 너한테 말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어.
이걸 봤다면, 네가 더 이상 이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건데... 그럼 이게 적합한 방법일거야. 확실히.
침실에 가보면, 파란 램프가 있는 서랍장이 있을거야.
첫 번째 칸을 열어. 칸 뒤쪽에 병이 있는데 안에 알약들이 있을거야.
"물과 함께 알약을 모두 삼켜라"라고 적혀있을 건데, 보면 병 안에 알약들이 많이 있을거야. 그것들을 전부 한꺼번에 삼키는 게 중요해, 알았지?
그러고 나서는, 그냥 누워서... 한 숨 자는 거야. 그리고 아무한테도 무슨 일을 할건지 말하지마.”

 

<지침에 따라 수면제를 먹으려고 하는 앨리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병세가 한참 진행된 어느 날 앨리스는 그 동영상을 보게 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해야 할 일들을 한꺼번에 다 기억하지 못해서 몇 번 실패하게 되지만, 결국 노트북을 들고 올라가서 서랍에 두었던 수면제통을 열고 물과 함께 복용하려고 하는 중, 갑자기 집에 온 간병인 때문에 수면제를 흘리고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한가지 생각할 점은 이때의 앨리스는 과연 정말 아직도 원래의 그 앨리스인가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아직 의식 상태가 있을 때 스스로의 미래의 삶을 예상하고 “자살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이제는 더 이상 원래 자신이 원했던 결정을 더 이상 시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원래의 앨리스가 원했던 것처럼 자살이 성공하는 것이 더 끝까지 앨리스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앨리스의 결정이 자살이었기 때문에 약간은 궤변처럼 되어버렸지만, 다른 결정이라면 어땠을까? 연명치료 대신 호스피스를 받고자 생각했지만 치매의 악화로 더 이상 본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 가족들이 끝까지 연명치료를 주장하고 본인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동의한다면 원래 본인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는가? 유산을 가족들에게 잘 분배하려고 유서를 썼었지만, 일부 가족들이 꼬드겨서 특정인에게 몰아주기로 유서를 변경하여 서명을 했다면, 어떤 유서가 존중되어야 하는가? 의사 결정 능력이 상실된 앨리스는 아직 앨리스(Still Alice)인가?

 

두 번째 이슈는 유전자 검사(genetic testing)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 젊은 의사 아들 톰(Hunter Parrish분)과 엄마를 똑 닮은 똑부러진 첫째 딸 안나(Kate Bosworth분)는 유전자 검사를 받기로 한다. 반면 배우를 하겠다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는 엄마 앨리스와 갈등관계에 있던 리디아(Kristen Stewart분)는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기로 한다. 검사 결과 톰은 치매유발 유전자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안나는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원래 임신을 시도하고 있던 안나는 배아(胚芽, embryo) 검사를 해서, 조기 치매 유전자가 없는 배아들만 착상시켜 아들과 딸 쌍둥이를 얻는다. 

 

<앨리스의 치매 진단 소식을 들으면서 유전자 검사를 권유받는 자녀들>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최근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에 대한 유전자 검사가 양성이어서, 예방적인 유방절제술과 난소절제술을 받으면서 질병 유전자 검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기 치매는 유방암보다 더 무섭고 피하고 싶은 병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앨리스가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라고 했듯이.

 

현재까지 조기 치매에 관련된 대표적인 유전자는 세 가지- Presenilin 1과 2, 그리고 Amyloid precursor protein(APP)가 있는데, 이 유전자의 변이를 보유한 경우에는 대부분이 50세 이전에 치매의 임상증상이 나타나며, 상염색체 우성(autosomal dominant)으로 유전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유전자가 대물림 될 확률은 50%이다.

 

현재 조기 치매를 막을 뚜렷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는 것이 좋을까? 혹시 조기치매로 진행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면 불안하고 절망적이기만 하지 않을까? 조기 치매 유전자가 없다는 것을 알면 더 걱정 없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까? 어차피 효과적인 예방 방법이 없으니 아예 있는지 없는지 검사를 받지 말고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나을까?

적어도 임신과 출산 계획에는 도움이 될테니 그래도 아는 것이 더 좋을 것인가? 만일 유전자가 있다면 자녀를 가질 때에는 조기 치매 유전자가 없는 배아만 골라서 착상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극단적으로 가정한다면 앨리스와 같은 사람은 만일 앨리스의 엄마 시대에 유전자 검사가 있어서 배아 선택을 했다면 태어날 수 없었을 사람인데 앨리스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틸 앨리스>가 던지는 오래된 의료윤리학적 의문들에 몇 마디로 쉽게 성급한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러티브를 따라가면서 질병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딜레마를 천천히 곱씹어 보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는 있게 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최근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는 것이 예비 의료인 교육에 사용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환자나 가족들의 질병에 대한 체험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게 함으로써 환자를 단지 질병이 아닌 질병을 겪어나가는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취지이다. <스틸 앨리스>는 최근의 의학 영화 중 서사의학 콘텐츠로 단연 으뜸이라 생각한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공감 NECA>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