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상일 교수(울산의대 예방의학교실)
photo by Russel Weller,freeimages.com(CC BY-SA)
병원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환자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병원의 환자안전 수준을 대표할 수 있는 조사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지만, 한 대학병원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입원 환자 중 7%가 위해사건을 경험하고 그 중 61%가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1 우리나라에서도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2015년 1월 28일 환자안전법을 제정하였고, 하위 법령을 마련하여 2016년 7월 29일부터 시행함으로써 환자안전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국가 차원의 환자안전위원회의 설치(법 8조)와 환자안전종합계획의 수립(법 7조), 의료기관의 환자안전위원회 설치(법 11조)와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법 12조), 환자안전 사고 자율보고(법 14, 16, 17조), 환자안전 기준의 설정(법 9조), 환자안전 지표의 개발 및 보급(법 10, 15조), 환자안전 전담자의 교육(법 13조) 등이다.
그러나 많은 의료기관들은 환자안전법이 의료기관의 환자안전 활동을 지원하기 보다는 규제를 강화하는 법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율보고의 비밀보장 규정(법 18조)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환자안전법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인 환자안전보고학습시스템은 이미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뻔 했던 사건을 보고하여, 그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이러한 교훈을 모든 의료기관들이 공유하도록 함으로써 환자안전 사건의 발생을 줄이기 위한 시스템이다. 환자안전 사건의 보고에는 법적, 문화적, 규제적, 재정적 요인들이 개인, 기관 및 사회 수준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환자안전법의 자율보고 비밀보장 규정은 이 중 사회 수준에서 자율보고 장애 요인을 완화시키는 법적 측면의 제도적 장치로 볼 수 있다. 환자안전 사건의 보고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자율보고 비밀보장 외에도 여러 수준에 걸친 다각적인 노력이 함께 필요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환자안전 사건 보고를 활성화하기 위한 몇 가지 생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고에 따른 보고자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는 ‘사고’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양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환자안전법에서는 ‘환자안전 사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사고(accident)’ 대신 ‘사건(inciden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고’라는 용어는 보고 대상 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접오류(near miss)를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보고자에게 부담이 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법률 개정 과정에서 용어의 적절한 수정이 필요하며, 법률 용어 이외의 용도로는 환자안전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둘째, 의료기관 내에서의 환자안전 관리 활동에 대한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현재의 환자안전법에서는 보건복지부장관에게 자율 보고하는 사건에 대한 비밀을 보장하고 있을 뿐, 의료기관 내에서의 사건보고 및 분석에 대한 법적 보호 조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영국에서의 경험에 따르면 국가보고학습시스템에 보고된 사건의 대부분이 의료기관 내부 보고를 통하여 수집된 자료를 모아, 의료기관들이 국가 시스템에 전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의료기관 내부의 보고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고는, 국가 차원의 보고 시스템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2005년에 제정된 미국의 환자안전 및 의료질향상법(Patient Safety and Quality Improvement Act of 2005)에서도 의료기관 내에서 이루어진 환자안전 관련 활동 결과물인 Patient Safety Work Products에 대한 법적인 보호 규정을 두고 있다. 4
셋째, 빠른 시일 내에 보고학습시스템 운영 기관의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현재 보건복지부장관이 보고학습시스템의 운영을 의료기관평가인증원에 위탁하고 있으나, 현재의 인력 수준 및 인적 구성으로는 보고학습시스템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판단된다. 보고학습시스템 운영 1개월간 7건의 보고만이 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고에 따른 가시적인 후속 조치가 없었다. 환자안전 전문가인 Leape가 성공적인 위해사건 보고시스템의 7가지 특성을 제시한 바 있다. 5 이 조건 중 처벌하지 않음, 비밀 보장, 독립성은 환자안전법의 제정으로 어느 정도 갖추어졌지만, 분석의 전문성, 적시성, 시스템 지향성, 반응성을 충족하기 위한 역량 개발이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의료기관들의 사건보고 활성화를 위한 ‘당근과 채찍’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의료질평가지원금 평가 영역의 지표에 환자안전 사건보고 건수를 추가하거나 의료기관별 보고 건수를 공개하는 방안을 고려하여 볼 수 있다. 후자의 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는 국가보고학습시스템에 보고 건수가 많은 기관을 개방적인 환자안전 문화를 가진 정직한 모범 기관으로 NHS Choices를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6
다섯째, 환자안전보고학습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하여 단계별 접근 전략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매년 중점적으로 개선할 주제를 미리 정하여 그 주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보고를 하는 캠페인을 하는 방안, 지역별 또는 병상 규모별로 참여 의향이 있는 의료기관을 환자안전협력센터로 지정하여 내부 보고시스템과 국가 보고시스템의 연계를 강화하고, 보고된 사건의 분석 결과를 공유하며, 협력센터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및 기술적 측면의 지원을 제공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환자안전법의 시행은 환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환자안전보고학습시스템의 안정적인 정착은 우리의 앞에 놓여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서산대사 선시의 구절처럼 제도의 첫걸음이 그 이후의 경로를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여러 가지 방안을 이용하여 보고학습시스템을 활성화하여야 할 시점에 서있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 Hwang JI, Chin HJ, Chang YS. Characteristics associated with the occurrence of adverse events: a retrospective medical record review using the Global Trigger Tool in a fully digitalized tertiary teaching hospital in Korea. J Eval Clin Pract. 2014;20(1):27-35. [본문으로]
- Barach P, Small SD. Reporting and preventing medical mishaps: lessons from non-medical near miss reporting systems. British Medical Journal 2000;320(7237):759-763. [본문으로]
- Scobie S, Thomson R. The UK experience: the National Patient Safety Agency's Patient Safety Observatory. Italian Journal of Public Health 2005;3(2):52-58. [본문으로]
- Wikipedia. Patient Safety and Quality Improvement Act. [cited 2016/09/19] Available from https://en.wikipedia.org/wiki/Patient_Safety_and_Quality_Improvement_Act [본문으로]
- Leape LL. Reporting of adverse events.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02;20(347):1633-1638. [본문으로]
- NHS Choices. Open and Honest Reporting [cited 2016/09/19] Available from http://www.nhs.uk/Scorecard/Pages/IndicatorFacts.aspx?MetricId=8092&OrgType=Hospita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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