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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17 9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기적을 부르는 얼음물 -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글.금덕 기자(청년의사)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일명 루게릭 병은 정신과 감각은 그대로인데 정작 손가락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희귀질환이다. 치료법조차 없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루게릭 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루게릭 병 환자인 백종우(김명민 분)가 장례지도사인 이지수(하지원 분)를 만나 사랑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이다.  
 
주인공인 종우는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어릴 적 한 동네서 살았던 지수를 만난다. 장례지도사인 그녀는 시체 닦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두 번의 이혼을 당했지만 종우에게는 그녀의 손이 예쁘기만 하다.

 

 “루게릭? 총 맞았지. 한번 걸렸다하면 몸이 굳어서 3~4년 뒤 꼼짝없이 죽는 거지.”
“그래서 겁나나? 사람은 누구나 죽어. 순서가 다를 뿐이지.”
“아니 겁 안나. 나 절대 안 죽을 거거든.”

 

루게릭 투병인 종우는 지수에게 곁에 있어 주겠다며 사귀자고 고백 할 정도로 당당하고 긍정이다. 이렇게 연인이 된 지수와 종우는 하루를 1년처럼 소중한 추억을 쌓으며 시간을 보낸다. 종우는 적극적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지수는 그런 그를 성심껏 간호하면서 증상이 호전되는 듯 했다.

 

영원할 것 같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살고 싶은 의지가 너무 강했던 걸까. 지수는 유명하다는 소문만 믿고 한 영양원에서 종우에게 불법 침 시술을 하게 한다. 그 부작용으로 종우는 죽을 위기를 겨우 면하지만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된다.

 

이후 그는 사법고시를 패스했다고 병문안 온 친구와 달리 투병 끝에 숨진 병실 환자를 보면서 제 몸도 못 가누는 처지에 괴로워한다.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느낀 그는 지수에게 모질게 대해 헤어진다.

 

종우가 앓고 있는 루게릭 병은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이렇다 할 치료약도 없다. 기껏 증상을 다소 늦추는 약물이나 재활치료를 하는 게 전부다. 보통 3~4년 이후 사망한다고 알려졌는데 루게릭 병이라는 명칭의 주인공인 야구선수 루게릭(1939년)은 2년 만에 사망했다. 반면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50년 이상 생존해 있다. 다만 스티븐 박사는 가슴에 파이프를 꽂아 호흡하고 음성합성기를 통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

 

종우도 점점 근육세포가 없어지면서 실제로 농구선수 출신 루게릭병 환자인 박승일 씨처럼 눈 깜박임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그런 그는 자신이 산송장, 식물인간, 박제인간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몸속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가위에 눌려본 적 있다면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소리를 지른 듯 소리칠 수 없는 공포감을 말이다.

 

 

이런 루게릭 병 환자는 지난해만 2,738명이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운동뉴런질환 통계자료). 남성이 절반 이상인 61% 정도이고 50~60대가 제일 많다. 최근에는 여성 환자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 5년간 여성 환자의 증가율은 31%로 남성(16%)의 두 배다. 10대 환자도 55명으로 30명이었던 2009년보다 25명이 늘었다. 연령을 막론하고 연평균 5%씩 환자가 늘고 있어서 치료법 개발은 물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12년째 루게릭 병으로 투병 중인 박승일 씨가 가수 션과 ‘승일희망재단’을 만들어 루게릭 병 전문 요양병원 설립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

 

최근 미국은 물론 국내 유명인들까지 동참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ice bucket challenge)도 뜻을 함께 한다. 얼음물을 뒤집어 써 순간 몸이 굳는 듯 루게릭 병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감하자는 릴레이 캠페인으로, 지목받은 3명도 얼음물 샤워 또는 미국 ALS협회에 100달러 기부한다. 물론 둘 다 해도 된다.

 

일부에서는 반짝 이벤트로 전락했다는 등 부정적인 시각도 없진 않지만 많은 이들에게 루게릭 병을 알리고 치료를 위한 성금을 모금한다는 취지는 그 자체로 값지다.

 

오히려 아쉬운 데는 따로 있다. 이미 전국에는 1,284개의 요양병원이 있다는 점이다. 2004년 113개보다 10배 이상 늘었지만 루게릭 같은 희귀질환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정부가 장기요양의 수요증가에만 집착해 무분별하게 설립기준을 풀어 줘 그 수는 늘었지만 정작 한시가 급한 희귀질환자를 위한 곳은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희귀난치성질환 의료비 지원사업 예산을 더 깎았다. 내년 예산은 267억원으로 2013년도 315억, 2014년 297억에 이어 계속 줄고 있다.

 

아이스 버킷 캠페인이나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영화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시 지나가는 관심과 유행이 아닌 정책지원이 뒷받침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야 영화 속 종우가 기지개를 켜고 병실침대에서 가뿐히 내려와 즐겁게 춤을 추던 일이 기적처럼 실제로도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