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금덕 기자(청년의사)
최근 다중인격장애(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새해 들어 MBC 드라마 <킬미, 힐미>와 SBS <하이드 지킬, 나> 등 잇따라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선보인 탓도 있겠지만, 정신분열증은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사용된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과거 미디어에서는 정신분열증이 있는 주인공이 평소 잠재된 또 다른 인격에 의해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는 다소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져 왔다.
2003년에 선보인 영화 <아이덴티티> 역시 다중인격장애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예상을 뒤집는 반전까지 더하고 있어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네바다 주의 외딴 모텔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언뜻 보면 그저 그런 공포 영화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리무진 운전사인 주인공 에드(존 쿠삭 분)가 태우던 여배우가 숨지고, 이어 막 결혼을 한 부부 중 남편이, 또 경찰이 호송하던 살인범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등 순서대로 누군가가 죽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살인이 일어난 곳에 10, 9, 8… 순서대로 객실 번호가 적힌 열쇠가 단서로 남는다.
하지만 사망자가 늘어날수록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갇힌 등장인물들은 사건의 진실에 하나씩 접근해 가면서 흥미를 더한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다른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뭘까. 우연히 그들 중 고향이 같은 이들이 있더니 11명의 인물들 모두 생일 같다는 점 들을 알게 되고 만다.
영화는 같은 시각 또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보여준다. 이날은 6명을 살인한 말콤 리버스(프루이트 테일러 빈스 분)이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시각인데, 닥터 맬릭(알프리드 몰리나 분)은 말콤 리버스가 다중인격장애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판사를 설득한다.
즉, 말콤 리버스가 저질렀다는 살인은 실제 말콤이 아닌, 그의 인격 중 하나가 저지른 일이라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만약 말콤의 몸속에 공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인격을 마주하게 해 하나씩 죽이면서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 된다고 치료를 한다.
이쯤되면 눈치 빠른 관객은 주인공 에드는 말콤 리버스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텔에 모였던 11명 모두가 에드의 또 다른 인격이었던 것이다. 한명씩 살해 당하는 것은 상처받은 인격이 없어지고 마지막 한 인격만 남게 되는 과정이 일종의 치료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한 정신분열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표현할 수 없는 개인의 숨겨진 이중성을 대신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에 비친 다중인격장애의 모습은 좀 달라졌다. 드라마 <킬미, 힐미>를 예로 들면, 주인공 차도현(지성 분) 역시 아이덴티티의 에드처럼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지만, 치료법으로 인격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도현 속에 있는 6개 인격들마다 가지고 있는 과거의 끔찍한 경험이나 상처 등이 치유돼 가는 방법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예정이다. 그 과정에는 정신건강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 오리진(황정음 분)이 함께한다. 제작진은 이 드라마를 통해 인간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 건 진심어린 위로와 사랑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싶다고 한다.
MBC, 킬미 힐미 | SBS, 하이드 지킬, 나 |
그런면에서 동시간에 상영되고 있는 <하이드 지킬, 나>는 어떤가. 이 드라마는 기존에 사이코패스를 연상시키는 원작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정 반대로 묘사한 작품이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사회생활을 하던 인물이 내면 속 악한 자아가 나타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달리 내면에 선한 인격이 존재한다는 가설이다. 물론 주인공 구서진(현빈 분)이 또다른 인격인 로빈과 시간을 나눠서 서로 활동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 드라마 속에 비춰진 다중인격장애는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측은함, 친근함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나아가 미디어의 기능 중 하나가 미디어 속의 현실을 개인의 인식이나 가치와 비교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칫 미디어가 현실을 외면한, 극단적인 상황만을 전달하면 오히려 왜곡된 인식과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정신질환이라는 병적 증세를 살인 등 범죄에 대한 면죄부로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주변사람들과 어울리며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는 오랫동안 자리잡은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시킬 수도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비 심사결정 자료만 보더라도 한해 5000여명이 ‘습관 및 충동장애’로 의료기관을 찾고 있다. 매년 그 수가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정신질환에 대한 주변의 잘못된 시선으로 치료를 꺼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제는 드라마속의 정신질환자의 이야기가 한때 스쳐지나가는 이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소소한 인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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