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금덕 기자(청년의사)
ⓒ 영화 판도라 스킬컷
“아들(아이들)한테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나, 아니면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나. 무섭다고 눈 감지 말고, 겁난다고 귀 막지 마라.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뿐기다. 재앙도 불행도 있지만, 희망도 있다 안하나. 우리는 그 희망을 찾아야 하는 기라. 우리 아들을 위해가.”
영화 <판도라>에서 주인공 재혁(김남길 분)이 “원자력발전소를 왜 그렇게 싫어하냐”는 여자친구인 연주(김주현 분)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동남권 지역 원자력발전소의 인부인 재혁에게 이 발전소에서 아버지와 형을 사고로 잃은 곳으로,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려고 한다. 사고가 난 그날도 어머니의 잔소리에 못이겨 발전소로 출근길에 나섰다.
ⓒ 영화 판도라 스킬컷
그는 수년째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을 알리는 시위대들을 뒤로 하고 평소처럼 친구와 동료들과 일터로 들어섰다. 같은 시각, 발전소 홍보관 직원인 연주는 ‘진도 7에도 견디는 내진공법이 갖춰진 시스템으로, 철저한 안전점검과 감시체계로 사고위험성은 제로에 가깝다’며 발전소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잠시, 이날 동남권 지역에 발생한 진도 6.1의 지진에 의해 한별1호기의 냉각수 밸브가 파손된다. 초기 대응 미비로 사태는 악화돼 원자로 멜트 다운(melt down) 현상이 발생하지만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만 하는데….
영화 <판도라>는 원전 사고를 소재로 하면서 개봉 이전부터 국내는 물론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개봉 시기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이후인데다 한국 역시 원전사고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경주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안전문제와 부근에 밀접해 있는 원전관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재난영화 특유의 극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이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사고는 물론 사태의 심각성을 숨기는데 급급한 정부나 사실상 대응책조차 전무한 모습, 이러한 가운데 언론의 보도만 믿고 우왕좌왕 대피하는 시민들의 모습. 이는 메르스 사태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면서도 이러한 영화 역시 원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재생산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실제로도 지난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 현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원자력발전소는 수소폭발을 일으키며 방사능이 누출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첫날부터 멜트 다운이 시작된 것을 한 달이 넘도록 인정하지 않았고, 완전 복구가 불가능해 아직도 방사성물질은 계속 배출되고 있는 상태다.
ⓒ 영화 판도라 스킬컷
영화에서처럼 피폭대응을 해야 하는 의료기관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폐쇄됐고, 의료진도 두려움에 떨며 피난길에 오르거나 환자를 거부했다. 그 외에도 일본은 의료진과 지방정부 모두 비상대응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6번에 걸쳐 대피하고, 대피과정에서 피폭이 아닌 저체온, 탈수 등으로 60여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역시 일본이나 영화처럼 대응책이 전무하지는 않다.
국내에서 방사선 재난이 발생하면 한국원자력의학원 산하 국가방사선진료센터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된다. 방사선진료센터는 방사선비상진료체계 구축, 방사선 비상 진료분야 규제뿐만 아니라 방사선영향클리닉, 사고피복선량평가, 연구개발, 교육훈련 등의 업무를 하는 상시기구다.
2002년에 설립된 방사선진료센터는 연간 8회에 걸쳐 모의 훈련을 하고 재난 발생 시 방사선비상의료지원단이 피폭환자를, 그렇지 않은 환자는 재난의료지원팀이 컨트롤한다.
그럼에도 영화 제작단계에서 정부가 제작진에게 원전내부 등을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영화에 반영되지 않았다. 픽션이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가 가미됐다고 치더라도 사실상 원전과 관련된 국민 홍보나 교육이 턱없이 부족한 국내 현실을 감안하면 영화를 본 시민들에게는 불안감만 더 커질 수 있다.
재난 발생 이후 ‘유일한 방법은 이 나라를 빨리 벗어나는 것 밖에 없다’는 등 영화 속 방송에 혼란에 빠지는 장면 또한 시사점이 있다.
ⓒ 영화 판도라 스킬컷
실제 재난이 발생한 일본에서도 이러한 자극적인 표현으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반인들에게 대중매체는 위험인식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동일한 상황이라고 해도 일반인과 전문가의 위험에 대한 인식체계가 다르다는 것인데, 그만큼 소통의 형태가 중요하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때문에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의 행태는 위기상황일수록 신중해야하고 보도윤리 등 미리 준비할 매뉴얼이 필요하다.
특히 전문가들은 아직도 원전에 대한 의료진들의 인식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국내에서 방사선 재난이 발생하면 현장비상진료센터에서 중앙응급의료센터, 국군의무사령부, 보건소, 소방서 등 전문인력이 투입되도록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현장에 투입되는 의료진들의 안전 확보와 대응팀이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방사선 방호의 목표와 원칙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간호사 1명만 남은 채 모든 의료진과 대응팀이 대피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국한된 것으로, 일선 의료현장의 의료진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관심과 교육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일본 의사들은 여전히 시민방사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대한민국은 후쿠시마 이후 원전사고 우려 1위 국가입니다. 대비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면 의사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유심히 봅니다. 의료진들이 전문가로서 사람들이 신뢰하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기둥이 돼 줘야 합니다.”
재혁이 ‘낡아가는 데 다들 걱정도 안하고 관심도 없고, 나몰라라 하는게 참말로 무섭다’고 말한 것처럼 다시금 오늘을 돌이켜 봐야 할 때가 아닐까.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는 2011년 일본 원전사고 이후,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일본 원전사고로 인한 영향의 관점에서」 보고서를 발간, 보건의료 측면에서 객관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정보 제공 및 위험 소통 창구를 마련한 바 있다. |